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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안 마누엘 데 로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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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안 마누엘 데 로사스는 1793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태어난 아르헨티나의 정치인이자 군인이다. 그는 에스탄시에로(목장주)로서 부를 축적하고 가우초(아르헨티나의 카우디요)들의 지지를 기반으로 권력을 강화했다. 1829년 부에노스아이레스 주지사로 선출된 로사스는 독재 권력을 구축하고, 사막 원정을 통해 영토를 확장했다. 1835년부터 1852년까지 두 번째 주지사 임기 동안에는 국가 테러를 자행하며 전체주의 체제를 구축했다. 그는 1852년 카세로스 전투에서 패배한 후 영국으로 망명하여, 그곳에서 사망했다. 로사스는 아르헨티나 역사에서 논쟁적인 인물로, 그의 평가는 시대와 정치적 상황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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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안 마누엘 데 로사스
기본 정보
수염이 있고 파란 눈을 가진 남자가 군복을 입고 있는 모습의 그림
1850년경 후안 마누엘 데 로사스의 초상화
호칭카우디요
이름후안 마누엘 데 로사스
출생 이름후안 마누엘 호세 도밍고 오르티스 데 로사스 이 로페스 데 오소르니오
국적아르헨티나
출생일1793년 3월 30일
출생지부에노스아이레스, 리오데라플라타 부왕령, 스페인 제국
사망일1877년 3월 14일
사망지사우샘프턴, 영국
안장 장소레콜레타 묘지, 부에노스아이레스
서명Firma del Brigadier General Don Juan Manuel de Rosas-(transparent).png
서명 설명잉크로 쓴 필기체 서명
정치
직위부에노스아이레스 주지사
임기 시작1835년 3월 7일
임기 종료1852년 2월 3일
이전마누엘 비센테 마사
다음비센테 로페스 이 플라네스
임기 시작 11829년 12월 6일
임기 종료 11832년 12월 5일
이전 1후안 호세 비아몬테
다음 1후안 라몬 발카르세
정당단일당 (1820–26)
연방당 (1826–52)
배우자엔카르나시온 에스쿠라 (1813년 3월 16일 결혼 – 1838년 10월 20일 사망)
자녀후안 바우티스타 오르티스 데 로사스
마누엘라 로부스티아나 로사스
페드로 데 로사스 이 벨그라노 (양자)
앙헬라 로사스 (비공식)
에밀리오 로사스 (비공식)
호아킨 로사스 (비공식)
니카노라 로사스 (비공식)
후스티나 로사스 (비공식)
아드리안 로사스 (비공식)
군사
전투영국의 라플라타 침공
아르헨티나 내전
사막 작전 (1833–1834)
타리하 전쟁
프랑스의 리오 데 라 플라타 봉쇄
영국-프랑스의 리오 데 라 플라타 봉쇄
플라타 전쟁
우루과이 내전
카세로스 전투
기타 정보
별칭부에노스아이레스 주의 법과 제도 복원자
사막의 정복자
팔레르모의 호랑이

2. 초기 생애

후안 마누엘 데 로사스는 1793년 3월 30일 라플라타 부왕령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레온 오르티스 데 로사스와 아구스티나 로페스 데 오소르니오의 첫째 아이로 태어났다.[1][3] 그는 어릴 때부터 강한 의지와 지배적인 성격을 가진 어머니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3]

약 10세의 로사스


로사스는 8세까지 가정에서 교육을 받은 후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사립학교에 입학했다.[2] 1806년 영국군의 부에노스아이레스 침략 당시, 13세였던 그는 산티아고 리니에르스 부왕이 조직한 군대에 탄약을 배급했다.[3] 1년 후 영국군이 다시 침략했을 때, 로사스는 ''미게레테스 기병대''(민병대 기병대)에 배정되었으나, 질병으로 인해 현역 복무에서 제외되었을 가능성이 높다.[3]

영국 침략이 격퇴된 후, 로사스는 가족의 에스탄시아(목장)로 이주하여 목장 관리 실무 지식을 습득했다.[1] 1811년부터 가족 에스탄시아를 관리했고, 1813년에는 엔카르나시온 에스쿠라와 결혼했다.[3] 이후 독립하여 에스탄시에로(목장주)로서 성공적인 경력을 쌓았다.

2. 1. 출생과 가족

후안 마누엘 호세 도밍고 오르티스 데 로사스[1]는 1793년 3월 30일 라플라타 부왕령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있는 그의 가족 저택에서 태어났다.[2] 그는 레온 오르티스 데 로사스와 아구스티나 로페스 데 오소르니오의 첫째 아이였다.[3] 레온 오르티스는 스페인 부르고스 주 출신 이민자의 아들이었다. 군인이었던 레온 오르티스는 부유한 크리오요 가문과 결혼했다. 어린 후안 마누엘 데 로사스의 성격은 강한 의지와 지배적인 성격을 가진 그의 어머니 아구스티나의 영향을 크게 받았는데, 그녀는 1783년 인디언의 공격으로부터 자신의 재산을 지키다가 사망한 지주인 그녀의 아버지 클레멘테 로페스 데 오소르니오에게서 이러한 성격 특성을 물려받았다.[3]

당시 일반적인 관행처럼, 로사스는 여덟 살 때까지 가정에서 교육을 받았고, 그 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가장 좋은 사립학교로 여겨지는 학교에 입학했다. 부유한 지주의 아들에게 어울리는 교육이었지만, 그의 교육은 그다지 두드러지지 않았다. 역사가 존 린치에 따르면, 로사스의 교육은 "그 이후 몇 년 동안 그 자신의 노력에 의해 보충되었다. 로사스는 전혀 읽지 못한 것은 아니었지만, 시대, 장소, 그리고 그 자신의 편견이 저자의 선택을 제한했다. 그는 프랑스 절대주의의 사소한 정치 사상가들과 공감하는 듯하면서도 피상적인 친분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2]

1806년, 영국 원정군이 부에노스아이레스를 침략했다. 13세의 로사스는 부왕 산티아고 리니에르스가 침략에 대응하기 위해 조직한 군대에 탄약을 배급하는 일을 했다. 영국군은 1806년 8월 패배했지만, 1년 후 다시 돌아왔다. 그러자 로사스는 ''미게레테스 기병대''(민병대 기병대)에 배정되었지만, 이 기간 동안 질병으로 인해 현역 복무에서 제외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2. 2. 영국 침략 참여

1806년 영국군의 부에노스아이레스 침략 당시, 13세의 로사스는 산티아고 리니에르스 부왕이 조직한 군대에 탄약을 배급하는 임무를 수행했다.[3] 1806년 8월 영국군은 패배했지만, 1년 후 다시 침략했다.[3] 이때 로사스는 ''미게레테스 기병대''(민병대 기병대)에 배정되었으나, 질병으로 인해 현역 복무에서 제외되었을 가능성이 높다.[3]

2. 3. 에스탄시에로로서의 삶

영국 침략이 격퇴된 후, 로사스와 그의 가족은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그들의 에스탄시아(목장)로 이주했다. 라플라타 부왕령에서 대지주들은 자신들의 통제하에 있는 지역에 사는 가족들에게 식량, 장비, 보호를 제공했다. 그들의 사설 방위군은 주로 병사로 징집된 노동자들로 구성되었는데, 이들은 페온이라고 불렸으며, 대부분 가우초였다.[1]

스페인계 지주 귀족들은 인구 대다수를 차지하는 문맹의 혼혈 가우초들을 다스리기 어렵고 신뢰할 수 없다고 여겼다. 가우초들은 다른 노동력이 없었기 때문에 관용적으로 받아들여졌지만, 지주들에 의해 경멸의 대상이 되었다. 로사스는 가혹하고 권위적인 성격에도 불구하고, 휘하 가우초들과 잘 지냈다. 그는 그들처럼 옷을 입고, 그들과 농담을 하고, 그들의 장난에 참여하고, 그들에게 많은 돈을 지불했지만, 그가 그들의 동등한 존재가 아니라 그들의 주인임을 결코 잊지 못하게 했다.[2]

로사스는 목장 토지를 관리하는 실무 지식을 습득했고, 1811년부터 가족의 에스탄시아를 관리했다. 1813년,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부유한 가문 출신 엔카르나시온 에스쿠라와 결혼했다. 그 후 곧 부모의 재산을 떠나 스스로 경력을 쌓으려 했다.[3] 그는 소금에 절인 고기를 생산했고, 그 과정에서 토지를 획득했다. 세월이 흐르면서 스스로 에스탄시에로(목장주)가 되어 토지를 축적하는 동시에 정치적으로 유력한 안초레나 가문의 사촌들과 성공적인 파트너십을 구축했다. 그의 성공 비결은 새로운 생산 방식을 만들거나 기존의 생산 방식을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력을 배치하는 성실한 노력과 조직 능력이었다.

3. 권력 장악 과정

5월 혁명으로 라플라타 부왕령이 붕괴되고 아르헨티나 건국 과정이 시작되었지만, 로사스는 이 혁명을 의심했다. 그는 혁명가들이 산티아고 데 리니에르스 부왕을 처형한 것에 분노했다.[1]

1816년 투쿠만 의회가 스페인과의 관계를 단절하자, 로사스는 독립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였다.[2] 그러나 독립 이후 부에노스아이레스주는 다른 주들과 자치권 문제로 내전을 벌였다. 단일주의당은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우위를, 연방주의당은 주의 자치권을 주장했다.[3] 1820년, 로사스는 "콜로라도스 델 몬테"라는 부대를 이끌고 부에노스아이레스 군대에 합류하여 주 군대를 물리쳤다.

전쟁 후, 로사스는 군 복무로 명성을 얻고 기병 대령으로 승진했으며, 정부로부터 더 많은 토지를 받았다. 1830년까지 그는 부에노스아이레스 주에서 10번째로 큰 지주가 되었고, 의 토지와 30만 마리의 소를 소유했다. 이러한 배경을 바탕으로 로사스는 카우딜로가 되었다.

1828년 12월, 후안 라바예(Juan Lavalle)가 마누엘 도레고(Manuel Dorrego)를 처형하자, 로사스는 연방주의자 지도자 자리를 채우고 반기를 들었다. 그는 산타페 주의 에스타니슬라오 로페스(Estanislao López)와 동맹을 맺고 1829년 4월 마르케스 다리 전투(Battle of Márquez Bridge)에서 라바예를 물리쳤다.[3] 1829년 12월 6일, 부에노스아이레스 하원은 로사스를 주지사로 선출하고 ''facultades extraordinarias''(특별 권한)를 부여했다.[3] 그는 자신을 "지능적이고, 사심 없고, 지칠 줄 모르는 아버지 같은 독재"가 이상적인 정부라고 말하며 온정적인 독재자로 여겼다.[3]

3. 1. 카우디요의 등장

2명의 모자를 쓴 기수가 놀란 야생마 무리를 향해 달려가는 모습을 그린 그림
로사스의 사병으로 복무했던 가우초들이 야생마 사냥을 하고 있다.


1810년 5월 혁명은 이후 스페인의 라플라타 부왕령이 붕괴하고, 독립과 아르헨티나 건국으로 이어진 과정의 초기 단계였다. 로사스는 시골의 많은 지주들처럼 부에노스아이레스 시의 상인과 관료들이 주도하는 이 운동을 의심했다. 로사스는 혁명가들에 의해 산티아고 데 리니에르스 부왕이 처형된 것에 분노했다. 로사스는 식민지 시대를 안정적이고 질서 있으며 번영하는 시대라고 여기며 향수를 느꼈다.[1]

1816년 7월 투쿠만 의회가 스페인과의 모든 관계를 끊었을 때, 로사스와 그의 동료들은 독립을 이미 이루어진 사실로 받아들였다.[2] 독립은 라플라타 부왕령을 구성했던 영토의 분열로 이어졌다. 부에노스아이레스주는 다른 주들과 주 정부가 가져야 하는 자치의 정도를 놓고 내전을 벌였다. 단일주의당은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우위를 지지했고, 연방주의당은 주의 자치권을 옹호했다. 이 문제로 10년간 분쟁이 벌어졌고, 수도와 주 사이의 유대가 파괴되었으며, 전국적으로 새로운 공화국이 선포되었다. 부에노스아이레스 정부가 이러한 독립 국가들을 진압하려는 노력은 지역 저항에 부딪혔다.[3] 1820년 로사스와 그의 가우초들은 모두 빨간색 옷을 입고 "콜로라도스 델 몬테"("산의 붉은색")라는 별명을 얻어 부에노스아이레스 군대의 제5민병대에 입대했다. 그들은 침입하는 주 군대를 물리치고 부에노스아이레스를 구했다.

분쟁이 끝나자 로사스는 그의 ''에스탄시아''로 돌아와 군 복무로 명성을 얻었다. 그는 기병 대령으로 승진했고 정부로부터 더 많은 토지를 받았다. 이러한 추가 토지와 그의 성공적인 사업, 새로운 부동산 취득은 그의 재산을 크게 증가시켰다. 1830년까지 그는 부에노스아이레스 주에서 10번째로 큰 지주가 되어 30만 마리의 소와 의 토지를 소유했다. 새롭게 얻은 영향력, 군사적 배경, 광대한 토지 소유 및 자신에게만 충성하는 가우초 사병들을 통해 로사스는 이 지역의 주 전쟁 지도자들을 대표하는 카우딜로가 되었다.

3. 2. 부에노스아이레스 주지사 선출

1828년 12월,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중앙집권주의 주지사 후안 라바예(Juan Lavalle)는 마누엘 도레고(Manuel Dorrego)를 체포하여 재판 없이 처형했다.[3] 도레고가 사망하자 로사스는 공석이 된 연방주의자 지도자 자리를 채우고 중앙집권주의자들에 반기를 들었다. 그는 산타페 주의 카우딜로이자 통치자인 에스타니슬라오 로페스(Estanislao López)와 동맹을 맺고 1829년 4월 마르케스 다리 전투(Battle of Márquez Bridge)에서 라바예를 물리쳤다.[3] 그해 11월 로사스가 부에노스아이레스 시에 입성했을 때 그는 승리한 군 지도자이자 연방주의자의 수장으로 환영받았다.[3]

1829년 12월 6일, 부에노스아이레스 하원은 로사스를 주지사로 선출하고 그에게 ''facultades extraordinarias''(특별 권한)를 부여했다.[3] 이는 역사가들이 독재라고 묘사하는 그의 정권의 시작을 알렸다. 그는 자신을 온정적인 독재자로 여기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저에게 이상적인 좋은 정부는 지능적이고, 사심 없고, 지칠 줄 모르는 아버지 같은 독재일 것입니다… 저는 항상 백성을 위해 헌신했던 독재자들을 존경해왔습니다. 그것이 제 위대한 명칭입니다. 저는 항상 나라를 섬기려고 노력했습니다."[3]

4. 첫 번째 주지사 임기 (1829-1832)

로사스는 집권 초기, 심각한 재정 적자와 막대한 부채, 통화 가치 하락 등 여러 어려움에 직면했다.[1] 1828년 12월부터 1832년 4월까지 이어진 가뭄은 경제에 큰 타격을 주었다.[2] 유니테리언 연맹이 여러 주를 장악하고 있었으나, 1831년 3월 호세 마리아 파스 체포로 내전이 종식되고 연맹은 붕괴되었다. 로사스는 연방 조약에서 주의 자치를 인정하고, 세금 인상 없이 세수를 늘리고 지출을 줄여 재정 문제를 완화했다.[3]

로사스는 첫 임기 동안 정치·재정적 불안정을 막았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하원의 반대가 증가했다. 라발레에 의해 해산되었던 의회가 복원되면서 의원들은 모두 연방주의자였다. 자유주의적 연방주의자들은 독재를 일시적인 필요로 받아들여 헌법 제정을 요구했다. 그러나 로사스는 헌법에 얽매이는 통치를 원하지 않았고, 1832년 12월 5일 임기를 마쳤다.

이후 목축업자들의 남부 진출로 원주민과의 갈등이 심화되자,[1] 로사스는 주지사 재임 기간 동안 가뭄으로 대체 목초지를 찾는 목축업자와 남부 전쟁 참전 용사들에게 토지를 부여하며 확장을 지지했다.[2] (이후 내용은 '사막 원정' 하위 섹션과 중복되므로 생략)

4. 1. 독재 권력 강화

로사스는 집권 초기, 심각한 재정 적자와 막대한 부채, 통화 가치 하락 등 여러 어려움에 직면했다.[1] 1828년 12월부터 1832년 4월까지 이어진 가뭄은 경제에 큰 타격을 가했다.[2] 로사스는 세금 인상 없이 세수를 늘리고 지출을 줄이는 방식으로 재정 문제 해결을 시도했다.[3]

유니테리언 연맹을 붕괴시키고 호세 마리아 파스를 체포하여 내전을 종식시켰으나, 각 주의 자치를 인정해야 했다. 임기 말, 정치·재정적 불안정을 막았다는 평가를 받았음에도, 헌법 제정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자 독재 권력을 내려놓고 1832년 12월 5일에 임기를 마쳤다.

이후 목축업자들의 남부 진출로 원주민과의 갈등이 심화되자, 로사스는 사막 원정을 이끌며 원주민 부족을 진압하고 영토를 넓혔다. 항복한 원주민에게는 관대했으나, 저항하는 이들에게는 가혹했다. 로사스는 "훌륭한 영토는 안데스 산맥에서 해안까지, 그리고 마젤란 해협까지 이어져 우리 아이들에게 넓은 공간을 열어주었다"라며 영토 확장의 의의를 강조했다.

4. 2. 사막 원정 (1833-1834)

군복을 입은 세 명의 기병이 언덕 위에 서 있고, 주변에는 시체가 흩어져 있으며, 한 명의 군복을 입은 남자가 아래 계곡을 가리키고 있는데, 그곳에서는 반라의 전사들이 군복을 입고 말을 탄 부대 앞에서 도망치고 있는 모습을 묘사한 채색 판화
로사스(어두운 말을 탄)가 사막 원정에서 인디언과의 전쟁을 지휘하는 모습, 1833년


부에노스아이레스 정부가 정치적 내분에 휘말리는 동안, 목축업자들이 원주민 거주 지역인 남부로 이동하기 시작하면서 원주민과의 갈등이 발생했고, 이에 정부의 대응이 필요하게 되었다.[1] 로사스는 이러한 영토 확장을 지지하는 정책을 확고히 추진했다. 그는 주지사 재임 기간 동안 가뭄으로 인해 대체 목초지를 찾는 목축업자와 남부 전쟁 참전 용사들에게 토지를 부여했다.[2] 당시 남부는 사실상 사막으로 여겨졌지만, 특히 목축업에 유리한 농업 개발 잠재력과 자원이 풍부했다.[2]

정부는 로사스에게 군대를 지휘하여 해당 지역의 인디언 부족을 진압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로사스는 항복한 인디언들에게는 관대하게 동물과 물건을 주었지만, 항복을 거부하는 자들은 끈질기게 추격했다.[3] 1833년부터 1834년까지 지속된 사막 원정을 통해 로사스는 그 지역 전체를 정복했다. 남부 정복은 더 많은 영토 확장의 가능성을 열었고, 그는 "훌륭한 영토는 안데스 산맥에서 해안까지 그리고 마젤란 해협까지 이어져 우리 아이들을 위한 넓은 공간을 열었습니다."라고 말했다.

5. 두 번째 주지사 임기 (1835-1852)

로사스는 1835년 3월 7일 부에노스아이레스 주지사로 재선되어 공공 권력의 총합(sum of public power)을 장악했다.[1][2] 그의 재선과 독재 권력 재개를 지지하는지에 대한 국민투표가 실시되었는데, 99.9%의 "찬성" 결과가 나왔다. 이는 로사스가 1829년부터 1832년까지의 첫 주지사 임기 동안 사법 평화 판사(justices of the peace) 임명을 통해 선거 과정을 조작했기 때문이다.[3] 사법 평화 판사들은 유권자 배제와 야당 탄압을 통해 로사스가 원하는 결과를 만들어냈고, 하원 의원의 절반이 매년 재선을 치르는 조작된 선거를 통해 로사스는 입법부를 장악했다.

로사스는 국가 인구의 대부분이 문맹인 상황에서 정치적 안정을 위해 선거 조작이 필요하다고 믿었다. 그는 자신과 견해를 같이하는 대지주(에스탄시에로)와 사업가들의 지지를 얻어 주에 대한 절대 권력을 행사했다. 그는 의회, 관료 조직, 내각을 엄격하게 통제했으며,[1] 반대 신문들은 공공 광장에서 불태워졌다.[3] 자신을 백성을 보호하는 전능하고 아버지 같은 인물로 묘사하는 정교한 개인숭배를 조성했고, 그의 초상화는 거리 시위와 교회 제단에 놓여 숭배되었다.

로사스는 전체주의 정권을 수립하여 공적, 사적 삶을 통제하려 했다. 공문서에 "야만적인 단일주의자들을 죽여라"라는 구호를 새기게 했고, 국가 예산에 의존하는 사람들에게는 "연방 또는 죽음"이라는 붉은 배지를 착용하게 했다. '로사스주의'의 상징인 붉은색은 부에노스아이레스 주에서 널리 사용되었다. 예수회를 제외한 대부분의 부에노스아이레스 가톨릭 성직자들은 로사스 정권을 지지했다. 하층민들의 생활 여건은 개선되지 않았지만, 로사스는 흑인과 가우초들 사이에서 인기가 있었다.

로사스는 반대파 및 위협으로 간주되는 모든 사람에 대해 국가 테러리즘으로 간주되는 조치를 취했다. 국가 테러는 ''소시에다드 포풀라르 레스타우라도라(Sociedad Popular Restauradora)''의 무장 준경찰 부대인 ''마소르카(Mazorca)''에 의해 수행되었다. 체포된 사람들은 고문당하고 살해되었으며, 1829년부터 1852년까지 약 2,000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산된다. 로사스는 사법부 임명을 통제하거나 법원의 권한을 우회하여 사법부의 독립성을 제거하고 직접 사건에 대해 판결을 내리고 형벌을 내렸다.

5. 1. 절대 권력 구축

1835년, 42세의 로사스의 측면 모습; 페르난도 가르시아 델 몰리노(Fernando García del Molino)의 소묘


1833년 10월, 후안 마누엘 데 로사스가 사막 원정에 나가 있는 동안, 그의 지지자들인 로시스타스(Rosistas)가 부에노스아이레스를 포위했다. 도시 안에서는 로사스의 아내인 엔카르나시온(Encarnación)이 포위자들을 돕기 위해 동료들을 모았다. 복원주의 혁명(Revolution of the Restorers)으로 주지사 후안 라몬 발카르세(Juan Ramón Balcarce)가 사퇴했다. 발카르세 이후에도 허약하고 무능한 정부를 이끈 두 명의 지도자가 연이어 등장했다. 로시스모(Rosismo, 로사스주의)는 연방당 내에서 강력한 파벌이 되었고, 다른 파벌들에게 안정을 회복하는 유일한 방법으로 독재 권력을 가진 로사스의 복귀를 받아들일 것을 압박했다.[1] 하원은 이에 굴복했고, 1835년 3월 7일 로사스는 다시 주지사로 선출되어 공공 권력의 총합(sum of public power)을 장악했다.[1][2]

부에노스아이레스 시민들이 로사스의 재선과 독재 권력 재개를 지지하는지 여부를 결정하기 위한 국민투표가 실시되었다. 1829년부터 1832년까지 주지사 재임 기간 동안 로사스는 선거 과정을 희극으로 전락시켰다. 그는 충성스러운 동료들을 사법 평화 판사(justices of the peace)로 임명했는데, 이들은 행정 및 사법 기능을 가진 강력한 직책으로 세금 징수, 민병대 지휘, 선거 주관 등의 임무도 맡았다.[3] 사법 평화 판사들은 유권자 배제와 야당 탄압을 통해 로사스가 원하는 결과를 만들어냈다. 하원 의원의 절반은 매년 재선을 치렀고, 조작된 선거를 통해 로사스에 대한 반대는 빠르게 제거되어 그가 입법부를 장악할 수 있게 되었다. 재정에 대한 통제권은 입법부로부터 박탈되었고, 입법부의 법안 승인은 형식적인 민주주의를 유지하기 위한 고무 도장에 불과했다. 1835년 선거 결과는 예상대로 99.9%의 "찬성" 투표였다.

로사스는 국가 인구의 대부분이 문맹이었기 때문에 선거 조작이 정치적 안정에 필요하다고 믿었다. 그는 그의 견해를 공유하는 대부분의 에스탄시에로(estancieros, 대지주)와 사업가들의 동의와 지지를 얻어 주에 대한 절대 권력을 얻었다. 에스탄시아(estancia, 대농장)는 로사스가 의존하는 권력 기반이었다. 린치는 "토지 소유 계급 사이에는 강력한 집단 결합력과 연대가 있었다. 로사스는 토지를 기반으로 한 광대한 친족 집단의 중심이었다. 그는 의원, 법률관, 관리, 군인 등으로 구성된 긴밀하게 연결된 경제 및 정치 네트워크에 둘러싸여 있었는데, 이들은 모두 토지 소유자였고 서로 또는 로사스와 친족 관계를 맺고 있었다"고 말했다.

5. 2. 전체주의 체제

군복을 입고 두루마리를 들고 있는 남자에게 깃발을 든 남녀 무리가 다가가는 그림, 배경에는 천막과 깃발이 보임
로사스에게 경의를 표하는 아르헨티나 노예들


로사스는 의회를 넘어 관료 조직과 내각을 엄격하게 통제하며 자신의 장관들을 비서관으로만 여겼다.[1] 그는 지지자들에게 관직을 주고 위협적인 인물들을 숙청했으며,[2] 반대 신문들은 공공 광장에서 불태워졌다.[3] 로사스는 정교한 개인숭배를 조성하여 자신을 백성을 보호하는 전능하고 아버지 같은 인물로 묘사했다. 그의 초상화는 거리 시위와 교회 제단에 놓여 숭배되었다. '로사스주의'는 연방주의 내 파벌을 넘어선 정치 운동이 되었다. 로사스는 1829년 우루과이 외교 사절에게 자신이 연방주의자가 아니라고 밝혔지만, 주지사 재임 기간 동안에는 연방주의를 지지하는 척하며 실제로는 '로사스주의' 운동에 흡수시켰다.

로사스는 전체주의 정권을 수립하여 공적, 사적 삶을 통제하려 했다. 공문서에 "야만적인 단일주의자들을 죽여라"라는 구호를 새기게 했고, 국가 예산에 의존하는 사람들에게는 "연방 또는 죽음"이라는 붉은 배지를 착용하게 했다. 남성들은 "연방 스타일"의 콧수염과 구레나룻을 길러야 했고, 가짜 콧수염을 착용하는 사람도 많았다. 연방당과 '로사스주의'의 상징인 붉은색은 부에노스아이레스 주에서 널리 사용되었다. 군인들은 붉은색 복장과 마구류를 착용했고, 민간인 남성은 붉은 조끼, 배지, 모자 띠를, 여성은 붉은 리본을 착용했으며, 어린이는 '로사스주의' 교복을 입었다. 건물 내외부도 붉은색으로 장식되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가톨릭 성직자 대부분은 로사스 정권을 지지했다. 예수회만이 유일하게 반대하여 추방되었다. 하층민들은 생활 여건 개선을 경험하지 못했다. 로사스의 지출 삭감으로 교육, 사회복지, 공공 사업 자원이 감소했고, 몰수된 토지는 농촌 노동자들에게 돌아가지 않았다. 흑인들 역시 개선을 경험하지 못했지만, 로사스는 노예 소유주로서 노예 무역을 부활시키는 데 기여했다. 그럼에도 그는 흑인과 가우초들 사이에서 인기가 있었는데, 흑인들을 고용하고 축제를 후원하며 ''칸돔블레''에 참석했고, 가우초들은 그의 리더십과 소통하려는 의지를 존경했기 때문이다.

5. 3. 국가 테러

로사스는 숙청, 추방, 검열 외에도 반대파 및 위협으로 간주되는 모든 사람에 대해 국가 테러리즘으로 간주되는 조치를 취했다. 이러한 테러는 반대파를 위협하고, 자신의 지지 세력을 확보하며, 적들을 제거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되었다. 희생자들은 일치파와 연계되었다고 비난받거나, 충분히 충성스럽지 않다고 의심되는 사람들이었다. 실제 반대자들이 없을 경우, 정권은 다른 표적을 찾아 본보기로 처벌하여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고 로사스의 명령에 대한 무비판적인 순응을 만들어냈다.

국가 테러는 ''소시에다드 포풀라르 레스타우라도라(Sociedad Popular Restauradora)''의 무장 준경찰 부대인 ''마소르카(Mazorca)''에 의해 수행되었다. ''소시에다드 포풀라르 레스타우라도라''와 ''마소르카''는 모두 로사스가 창설하고 엄격하게 통제했다. ''마소르케로스(mazorqueros)''는 이웃을 순찰하며 집을 수색하고 거주자들을 위협했다. 체포된 사람들은 고문당하고 살해되었는데, 살해는 총격, 창으로 찌르기, 목을 긋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많은 사람들이 거세당하거나, 수염이 벗겨지거나, 혀가 잘리는 등의 잔혹 행위를 당했다. 1829년부터 1852년까지 약 2,000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산된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는 사법 제도가 존재했지만, 로사스는 사법부 임명을 통제하거나 법원의 권한을 우회하여 사법부의 독립성을 제거했다. 그는 직접 사건에 대해 판결을 내리고 형벌을 내렸다. 국가 테러는 로사스만이 통제할 수 있었으며, 특정 표적에 대해 조직적으로 사용되었다. 이는 무차별적인 것이 아니라 효과를 위해 표적을 삼았으며, 희생자들은 위협의 도구로서의 유용성 때문에 선택되었다.

6. 지배력 강화를 위한 투쟁

1830년대 후반과 1840년대 초반, 로사스는 안드레스 데 산타 크루스가 이끄는 페루-볼리비아 연방과 동맹을 맺은 연방주의자들의 위협에 직면했다. 로사스는 1837년 페루-볼리비아 연방에 전쟁을 선포하고 연방 전쟁에 참전했지만, 큰 성과는 없었다. 결국 산타 크루스가 축출되고 페루-볼리비아 연방은 해체되었다.[1]

1838년, 프랑스는 부에노스아이레스 항을 봉쇄하여 로사스 정권에 압박을 가했다. 로사스는 이에 맞서 국내 반대파를 탄압하며 위기를 넘겼다.[2] 봉쇄로 인해 부에노스아이레스 항을 이용하던 다른 주들도 경제적 타격을 입었고, 이는 1831년 연방 조약에도 불구하고 부에노스아이레스 주에 대한 불만을 키웠다.[2]

1839년, 코리엔테스 주가 반란을 일으켰고, 로사스는 이를 진압했다.[3] 같은 해, 로사스는 '마자 음모'로 알려진 반대파의 쿠데타 시도를 진압하고 관련자들을 처형했다. 이 과정에서 마누엘 비센테 마자 의장이 살해되기도 했다. 남부에서는 남부 반란이 일어났지만, 이 역시 진압되었다.,

후안 라바예는 1839년 망명에서 돌아와 코리엔테스 주와 연합하여 반란을 일으켰고, 투쿠만, 살타 등 북부 주들도 이에 합세하여 북부 동맹을 결성했다. 그러나 영국이 로사스를 지원하면서 프랑스는 1840년 봉쇄를 해제했고, 1842년 라바예가 사망하고 1847년 코리엔테스 주가 항복하면서 반란은 종식되었다. 로사스 지지자들은 포로를 학살하고 목을 베어 전시하는 등 잔혹 행위를 저질렀다.

6. 1. 반란과 외세의 위협

1830년대 후반과 1840년대 초반, 로사스는 여러 심각한 위협에 직면했다. 연방주의자들은 페루-볼리비아 연방의 통치자 안드레스 데 산타 크루스와 동맹을 맺었다. 로사스는 1837년 3월 19일 페루-볼리비아 연방에 전쟁을 선포하고, 칠레와 페루-볼리비아 간의 연방 전쟁에 참전했다. 로사스 지지 군대는 이 분쟁에서 미미한 역할을 했고, 결국 산타 크루스는 축출되고 페루-볼리비아 연방은 해체되었다.[1] 1838년 3월 28일, 프랑스는 이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 부에노스아이레스 항을 봉쇄했다. 프랑스에 맞설 수 없었던 로사스는 정권에 대한 잠재적인 반란을 막기 위해 내부 탄압을 강화했다.[2]

봉쇄는 부에노스아이레스 항을 통해 상품을 수출하던 모든 주의 경제에 심각한 피해를 입혔다. 1831년 연방 조약에도 불구하고, 모든 주들은 부에노스아이레스 주가 가진 사실상의 우위에 오랫동안 불만을 품고 있었다.[2] 1839년 2월 28일, 코리엔테스 주가 반란을 일으켜 부에노스아이레스와 엔트레리오스 주를 공격했다. 로사스는 반격하여 반군을 물리치고, 코리엔테스 주지사인 그들의 지도자를 죽였다.[3] 6월에 로사스는 마자 음모로 알려진 사건에서 그를 권좌에서 몰아내려는 반대파 로사스 지지자들의 음모를 발견했다. 로사스는 일부 음모자들을 투옥하고 다른 일부는 처형했다. 하원 의장이자 대법원장이었던 마누엘 비센테 마자는 그의 아들이 음모에 연루되었다는 구실로 의회 건물 안에서 로사스의 마조르카(Mazorca) 대원들에 의해 살해되었다. 시골에서는 로사스의 남동생을 포함한 에스탄시에로(estancieros)들이 반란을 일으켜 남부 반란을 시작했다. 반군은 프랑스와 동맹을 맺으려고 했지만 쉽게 진압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목숨과 재산을 잃었다.

1839년 9월, 후안 라바예가 10년의 망명 생활 후 귀국했다. 그는 다시 한번 반란을 일으킨 코리엔테스 주지사와 동맹을 맺고 프랑스가 무장 및 지원한 연방주의자 군대를 이끌고 부에노스아이레스 주를 침공했다. 라바예의 행동에 고무된 투쿠만, 살타, 라리오하, 카타마르카, 후후이 주는 북부 동맹을 결성하고 부에노스아이레스에 맞서 반란을 일으켰다. 영국은 로사스를 대신하여 개입했고, 프랑스는 1840년 10월 29일 봉쇄를 해제했다. 내부의 적들과의 투쟁은 격렬했다. 1842년 12월까지 라바예는 사망했고, 1847년에야 패배한 코리엔테스 주를 제외한 반란 주들은 진압되었다. 로사스 지지자들은 포로를 거부하면서 전장에서도 테러를 자행했다. 패배한 사람들은 목이 잘리고 머리가 전시되었다.

6. 2. 아르헨티나의 통치자

1845년경, 후안 마누엘 데 로사스는 이 지역에 대한 절대적인 지배력을 확립했다. 그의 부하들은 몬테비데오를 제외한 우루과이 전역을 지배했다. 그는 라가머핀 전쟁(Ragamuffin War)의 분리주의자들에게 도움을 주어 이전의 미시오네스 오리엔탈레스(Misiones Orientales) 영토에 대한 통제권을 얻었다.[1] 그는 군대의 확고한 지원을 받아 사회 모든 부분을 통제했다. 1829년 12월 18일, 로사스는 대령에서 준장(최고 계급)으로 승진했다.[2] 1840년 11월 12일, 하원이 수여한 대원수(''gran mariscal'')라는 새로운 계급을 거절했다.[3] 군대는 그의 배경과 가치관이 비슷한 장교들이 이끌었다. 권력에 자신감을 가진 로사스는 몰수된 재산을 소유주에게 반환하고, 마조르카(Mazorca)를 해산했으며, 고문과 정치적 암살을 종식했다. 부에노스아이레스 주민들은 여전히 로사스가 부과한 규칙에 따라 옷을 입고 행동했지만, 끊임없고 광범위한 공포 분위기는 크게 줄었다.

1829년, 로사스가 처음 주지사로 선출되었을 때 부에노스아이레스 주 밖에는 아무런 권력이 없었다. 국가 정부나 국가 의회는 없었다. 이전의 리오데라플라타 부왕령은 리오데라플라타 연합주(United Provinces of the Río de la Plata)에 의해 계승되었고, 1831년 연방 조약 이후, 그리고 1835년 5월 22일부터는 아르헨티나 연방(Argentine Confederation) 또는 아르헨티나로 불리게 되었다. 1840년대 초, 로사스는 다른 아르헨티나 주들에서 승리하며 그 주들을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위성국으로 만들었다. 그는 동맹을 맺거나 너무 약해서 독립성을 가질 수 없는 주지사들을 임명하여 모든 주를 지배했다. 1848년, 로사스는 자신의 정부를 "연방 정부", "일반 정부"라고 부르기 시작했는데, 이는 몇 년 전에는 상상할 수 없던 일이다. 이듬해 그는 주들의 묵인 하에 자신을 "연방 최고 수장"으로 임명하고 아르헨티나의 통치자가 되었다.

로사스의 나이가 들고 건강이 악화되면서, 후계자 문제가 지지자들 사이에서 중요한 관심사가 되었다. 그의 아내 엔카르나시온은 1838년 10월 오랜 병으로 사망했다. 로사스는 슬픔에 잠겼지만, 그녀의 죽음을 이용해 자신의 정권 지지를 높였다. 얼마 후 47세의 로사스는 15세 하녀 마리아 에우헤니아 카스트로와 관계를 맺고 사생아 다섯 명을 두었다. 엔카르나시온과의 결혼 생활에서 로사스는 후안 바우티스타 페드로와 마누엘라 로부스티아나 두 자녀를 두었다. 로사스는 세습 독재를 수립하고 결혼으로 낳은 자녀들을 후계자로 지명하며, "그들은 나의 사랑하는 엔카르나시온의 훌륭한 자녀들이며, 하느님이 원하신다면 내가 죽으면 그들이 나를 계승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로사스가 은밀한 군주제(Monarchism) 지지자였는지는 알 수 없다. 망명 중 로사스는 영국 알리스 공주(Princess Alice of the United Kingdom)가 자신의 나라의 이상적인 통치자라고 선언했다. 그럼에도 그는 공개적으로 자신의 정권이 공화제라고 말했다.

7. 절정과 몰락

로사스는 1840년대 내내 팔레르모에 있는 자신의 시골 저택에서 은둔하며 통치했다.[1] 그는 장관들과 만나는 것을 거부하고 비서들에게만 의존했으며,[2] 그의 딸 마누엘라가 그의 아내를 대신하여 로사스와 외부 세계를 연결하는 고리가 되었다.[3]

한편, 브라질 제국의 황제 돔 페드루 2세 치하에서 브라질은 몬테비데오에 남아 있던 우루과이 정부와 후스토 호세 데 우르키사에게 지원을 제공했다. 한때 로사스의 가장 신뢰받는 부하였던 우르키사는 로사스에게 반란을 일으켰고, 1851년 8월 18일 로사스는 브라질에 선전포고하여 플라티나 전쟁을 시작했다. 우르키사는 브라질의 지원을 받아 아르헨티나 영토를 통해 부에노스아이레스로 진격했다.

로사스는 소극적인 태도를 유지했다. 1852년 2월 3일 카세로스 전투에서 패배한 후, 로사스는 부에노스아이레스로 도망쳐 변장을 하고 영국으로 가는 배에 탑승하여 망명 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나를 전복시킨 것은 국민이 아니다. 원숭이들, 브라질인들이다."라고 분노하며 말했다.

7. 1. 영국-프랑스 연합의 해상 봉쇄

52세의 로사스, 1845년


1810년대 라플라타 부왕령의 해체는 파라과이, 볼리비아, 우루과이 등의 독립 국가들을 출현시켰고, 남부 지역은 라플라타 연합주로 통합되었다. 로사스는 이전 부왕령의 영토를 상당 부분 복원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는 파라과이의 독립을 인정하지 않고 반란 지역으로 간주했다.[1] 마누엘 오리베 휘하의 군대를 파견하여 우루과이를 침략, 몬테비데오를 제외한 대부분 지역을 정복하고 1843년부터 장기간 포위 공격을 가했다.[2] 영국의 압력에도 로사스는 우루과이 독립을 보장하지 않았다.[3] 그란 콜롬비아와 페루-볼리비아 연방 등 남아메리카 내 잠재적 외세 위협이 사라지거나 내부 혼란을 겪는 상황에서, 로사스는 몬테비데오 항구를 봉쇄하고 내륙 강을 통한 외국 무역을 금지하여 우루과이와 파라과이에 대한 주장을 강화하고 아르헨티나 주에 대한 지배력을 유지하려 했다.

무역 손실은 영국과 프랑스에게 용납할 수 없었다. 1845년 9월 17일, 양국은 라플라타 강 영국-프랑스 연합 해상봉쇄를 수립하고 라플라타 분지의 자유 항해를 시행했다. 아르헨티나는 이에 저항하여 교착 상태에 이르렀다. 이 비공식 전쟁은 아르헨티나보다 프랑스와 영국에 더 큰 경제적 피해를 입혔다. 영국은 플라티나 지역 내 다른 항구 접근이 부에노스아이레스와의 무역 손실을 상쇄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고 국내 압력에 직면했다. 결국 영국은 1847년 7월 15일, 프랑스는 1848년 6월 12일 봉쇄를 해제하며 모든 적대 행위를 종식시켰다. 로사스는 세계 최강대국 두 나라의 저항에 성공적으로 맞서면서 그의 지위와 아르헨티나의 지위는 히스패닉 아메리카 국가들 사이에서 향상되었다. 베네수엘라의 휴머니스트 안드레스 벨로는 당시 여론을 요약하여 로사스를 "아메리카의 위대한 인물들 중 선두 주자"로 칭송했다.

7. 2. 플라티나 전쟁

웅장한 흰 빌라 옆을 따라 흐르는 운하를 보여주는 사진
1876년 팔레르모에 있는 로사스의 저택


로사스는 전국적으로 불만이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1840년대 내내 그는 팔레르모에 있는 자신의 시골 저택에 은둔하며,[1] 경비병과 순찰대의 삼엄한 보호 아래 통치했다.[1] 그는 장관들과 만나는 것을 거부하고 비서들에게만 의존했다.[2] 그의 딸 마누엘라가 그의 아내를 대신하여 그의 오른팔이 되었고 로사스와 외부 세계를 연결하는 고리가 되었다.[3]

한편, 브라질 제국의 황제 돔 페드루 2세 치하에서 브라질은 몬테비데오에 남아 있던 우루과이 정부와 후스토 호세 데 우르키사에게 지원을 제공했다. 우르키사는 로사스에게 반란을 일으켰는데, 한때 로사스의 가장 신뢰받는 부하였던 우르키사는 이제 헌법 정부를 위해 싸운다고 주장했지만, 국가 원수가 되려는 그의 야망은 거의 감추어지지 않았다. 보복으로 로사스는 1851년 8월 18일 브라질에 선전포고하여 플라티나 전쟁을 시작했다. 우루과이에서 오리베의 군대는 10월에 우르키사에게 항복했다. 브라질이 제공한 무기와 재정적 지원을 받은 우르키사는 아르헨티나 영토를 통해 부에노스아이레스로 진격했다.

로사스는 갈등 내내 소극적인 태도를 유지했다. 우르키사를 물리치더라도 그의 군대는 아르헨티나 침공을 준비하고 있는 브라질군에 도전할 수 없을 정도로 약해질 가능성이 높았다. 1852년 2월 3일 카세로스 전투에서 패배한 후, 로사스는 부에노스아이레스로 도망쳐 변장을 하고 영국으로 가는 배에 탑승하여 망명 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나를 전복시킨 것은 국민이 아니다. 원숭이들, 브라질인들이다."라고 분노하며 말했다.

8. 만년

로사스는 1852년 4월 26일 영국의 플리머스에 도착하여 망명 생활을 시작했다. 영국은 로사스에게 망명을 허가하고 여행 경비를 지원했으며, 21발의 예포로 그를 환영했다. 영국 외무장관은 로사스가 영국의 상인들에게 큰 존경과 친절을 베풀었기 때문에 이러한 예우를 했다고 설명했다.[1] 로사스는 실각 몇 달 전, 패배할 경우를 대비해 영국 대리 공사와 망명을 약속받았다.[2]

로사스는 망명 생활 동안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었지만, 농장 생활을 하며 검소하게 살았다. 그는 사우샘프턴 근처에서 소작농으로 일하며, 노동자들에게 평균 이상의 임금을 지불했다. 그는 농장 생활에 만족하며 "나는 이제 이 농장에서 자신을 행복하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망명 중에도 로사스는 아르헨티나의 상황을 주시하며 귀국할 기회를 엿보았지만, 다시는 정치에 개입하지 않았다. 한때 그의 지지자였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를 버렸고, 로사스주의는 하룻밤 사이에 사라졌다.

망명 중인 노년의 로사스


로사스는 1877년 3월 14일, 추운 날 산책 후 폐렴에 걸려 8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는 사우샘프턴 시립묘지(Southampton Old Cemetery)에 안장되었다.

8. 1. 망명과 죽음

로사스는 1852년 4월 26일 영국의 플리머스에 도착했다. 영국은 망명을 허가하고 여행 경비를 지불했으며, 21발의 예포로 환영했다. 영국 외무장관 제임스 해리스 말즈베리 경은 "로사스 장군은 보통의 망명자가 아니었고, 그의 나라와 무역을 했던 영국 상인들에게 큰 존경과 친절을 보였던 인물이었기 때문"이라고 이러한 예우를 설명했다.[1] 실각 몇 달 전, 로사스는 패배할 경우를 대비해 영국 대리 공사 로버트 고어 대위와 보호 및 망명을 약속했다.[2]

엔카르나시온과의 사이에서 낳은 두 자녀도 망명 생활을 함께 했지만, 후안 바우티스타는 곧 가족과 함께 아르헨티나로 돌아갔다. 딸 마누엘라는 로사스의 오랜 동료의 아들과 결혼했는데, 전 독재자는 이 일을 결코 용서하지 않았다. 권위적인 아버지였던 로사스는 딸이 자신에게만 헌신하기를 원했다. 그는 딸에게 편지를 쓰거나 방문하는 것을 금했지만, 마누엘라는 그에게 충성을 지키며 연락을 유지했다.[3]

새로운 아르헨티나 정부는 로사스의 모든 재산을 몰수하고 그를 범죄자로 재판에 회부하여 사형을 선고했다. 로사스는 그의 친구, 지지자, 동맹 대부분이 그를 버리고 침묵하거나 공개적으로 그를 비판하는 것을 보고 경악했다. 로사스주의는 하룻밤 사이에 사라졌다. 린치는 "로사스의 지지자이자 수혜자였던 지주 계급은 이제 그의 후계자들과 화해하고 이익을 얻어야 했다. 생존, 충성심이 아닌 생존이 그들의 정치였다"라고 주장했다. 한때 동맹이었고 나중에는 적이 된 우르키사는 로사스와 화해하고 그에게 재정적 지원을 보냈지만, 로사스는 더 이상 정치적 자본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정치적 지지를 기대하지는 않았다. 로사스는 망명 중에도 아르헨티나의 발전을 지켜보면서 항상 귀국할 기회를 기다렸지만, 다시는 아르헨티나 정치에 개입하지 않았다.

망명 중 로사스는 궁핍하지는 않았지만, 남은 생애 동안 재정적 제약 속에서 검소하게 살았다. 극소수의 충실한 친구들이 그에게 돈을 보냈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그는 몰수되기 전에 그의 에스탄시아 중 하나를 팔고 사우샘프턴 근처 스웨이슬링에서 소작농이 되었다. 그는 가정부와 2~4명의 노동자를 고용했는데, 그들에게 평균 이상의 임금을 지불했다. 지속적인 자금 부족에 대한 걱정에도 불구하고, 로사스는 농장 생활에서 기쁨을 발견했으며, 한때 "나는 이제 이 농장에서 자신을 행복하다고 생각합니다. 보시다시피 검소하게 살면서 이마에 땀을 흘려 힘들게 생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당시 한 사람은 그의 말년을 "그는 당시 80세였는데, 여전히 잘생기고 당당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태도는 매우 세련되었고, 검소한 환경은 그의 가문으로부터 물려받은 위대한 영주의 분위기를 덜하지 않았습니다."라고 묘사했다. 추운 날 산책 후 폐렴에 걸린 로사스는 1877년 3월 14일 오전 7시에 사망했다. 가족과 몇몇 친구들이 참석한 개인 미사 후 사우샘프턴 시립묘지(Southampton Old Cemetery)에 매장되었다.

9. 유산

로사스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시대와 이념에 따라 크게 엇갈린다. 19세기 자유주의 역사가들은 로사스를 폭군이자 독재자로 묘사했지만, 20세기 초 수정주의 역사가들은 로사스를 국가 주권 수호자이자 민족주의 지도자로 재평가하려는 시도를 했다.

1880년대 아돌포 살디아스와 에르네스토 케사다의 학술 연구 발표와 함께 로사스의 평판을 재평가하려는 진지한 시도가 시작되었다. 이후 1920년대 아르헨티나에서 등장하여 1930년대에 정점에 달한 ''나시오날리즘''(국가주의)과 함께 수정주의 운동이 더욱 활발해졌다. 그러나 수정주의는 학문적 기준 미흡 등의 이유로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9. 1. 로사스에 대한 평가와 논쟁

레콜레타 묘지에 있는 로사스 가족 납골당


로사스에 대한 평가는 극명하게 엇갈린다. 1880년대 아돌포 살디아스와 에르네스토 케사다의 연구 발표를 시작으로 로사스의 평판을 재평가하려는 시도가 나타났다. 이후, 1920년대 아르헨티나에서 등장하여 1930년대에 정점에 달한 ''나시오날리즘''(국가주의) 운동과 함께 "수정주의" 운동이 활발해졌다. 이는 나치즘, 파시즘, 전체주의와 같은 권위주의 이데올로기의 아르헨티나판이었다. 아르헨티나 국가주의는 권위주의적이고, 반유대주의적이며, 인종차별적이고 여성혐오적인 정치 운동으로, 우생학과 같은 인종 기반의 유사과학 이론을 지지했다. ''수정주의''(Revisionismo)는 아르헨티나 나시오날리즘의 역사학적 부문이었다. 국가 독재 수립을 목표로 했던 나시오날리즘 운동에게 로사스와 그의 정권은 이상적인 정부의 모범으로 묘사되었다. 수정주의자들의 주요 목적은 로사스의 이미지를 재평가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수정주의는 학문적 기준에 대한 관심 부족과 지적 분야에서의 제도적 변방성으로 인해 진지하게 받아들여지지 못했다. 로사스는 여전히 아르헨티나 역사에서 부정적인 인물로 기억되며, 그의 이름을 딴 기념비나 공공장소는 찾아보기 힘들다.

볼타 데 오블리가도 전투 기념비에 있는 로사스 조각상


1980년대 아르헨티나는 군사 독재, 경제 위기, 포클랜드 전쟁 패배로 인해 분열된 상황이었다. 카를로스 메넴 대통령은 로사스의 유해 송환을 통해 국민 통합을 시도했다. 그는 아르헨티나인들이 로사스와 그의 정권을 용서한다면, 더 최근의 과거에 대해서도 같은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1989년 9월 30일, 로사스의 유해는 부에노스아이레스 레콜레타 묘지에 안치되었고, 일주일 후 메넴은 더티 워 관련 군인 300명 가까이를 사면했다. 메넴을 비롯한 페론주의 대통령들은 지폐, 우표, 기념물에서 로사스를 기렸지만, 대중들의 반응은 엇갈렸다. 로사스는 여전히 아르헨티나인들 사이에서 논쟁적인 인물로 남아있다.

참조

[1] 뉴스 Pedro, el hijo secreto de Manuel Belgrano que fue adoptado por Juan Manuel de Rosas https://www.infobae.[...] 2020-06-20
[2] 서적 Mujeres de Rosas Sudamericana 2012
[3] 논문모음 S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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